[백신의학자] 코흐 1 :: 2009/03/17 11:44
하인리히 헤르만 로베르트 코흐
(Heinrich Hermann Robert Koch)
(1843년 12월 11일 ~ 1910년 5월 27일)

독일의 의사, 미생물학자이다. 탄저균(1877년), 결핵균(1882년), 콜레라균(1883년) 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핵균의 발견으로 190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다섯 번째 노벨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일반인들에게는 ‘결핵균의 발견자’로, 의사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세균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전세계 의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학자중 한 명이었다.
우표 모델로 최다 출연한 과학자를 꼽으라면 정답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벨상을 수상한 ‘세균학의 창시자’ ‘로베르트 코흐’라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결핵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에이즈를 발견한 과학자의 우표도 발행된 적이 없는데 결핵균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우표의 모델로 사용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류에게 공헌한 바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다면 그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코흐가 과학자로서 파격적으로 명예로운 대우를 받는 것은 그의 연구가 다른 어떠한 과학자보다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서양 및 동양으로부터 온 그의 제자들은 세균학의 새시대를 여는 창조자들이 되었다. 코흐의 트리파노소마(trypanosoma)에 관한 연구는 저명한 독일의 세균학자인 P. 에를리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코흐의 획기적인 연구가 끼친 영향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발견과 기술혁신은 그의 병인론의 기본 개념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1862년 괴팅겐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프리드리히 구스타프 야코프 헨레 밑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866년 의학박사를 취득하였고 졸업 후에 세포 병리학의 창시자이자 ‘의학의 교황’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던 루돌프 비르효(Rudolf Virchow, 1821~1902) 밑에서 6개월간 수학했다.
비르효는 공중보건위생의 개선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의 근본적인 개혁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의학이란 거시적으로 보아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이다’라고 말하는 등 의학 분야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비르효는 의학과 의술이 그 자체나 의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정신과 또 그러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학이 갖는 정치적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의학의 정치성을 강조한 것은 국민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보건 의료에서의 변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848년 가난한 북부 실레지아에서 발생한 발진티푸스가 창궐한 뒤 프러시아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비르효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황상익 박사의 글에서 인용한다.
‘이것은 더 이상 발진티푸스에 걸린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의학적 치료와 간호를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육체적으로 최대로 쇠약해진 150만 시민의 안녕에 관한 문제이다. 150만 명의 주민을 생각할 때 언제까지나 미봉책으로 대할 수는 없으며 근본적인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면, 주민들이 힘을 합치도록 격려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교육·자유·복지는 지금까지와 같이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없으며, 주민들이 스스로 그 필요성을 자각할 때에만 진정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의학의 정치성을 강조했던 비르효의 의학적 업적은 정맥의 염증을 연구하여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혈전(血栓)과 색전(塞栓)의 형성 기전을 규명한 것과 출혈성 백혈병이라는 병의 존재와 특성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특히 비르효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세포는 건강한 사람이나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생체 기능의 시작이자 발판이며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생긴다’는 ‘세포학설’을 확립했고 또한 세포가 바로 질병이 생기는 자리라는 ‘세포병리학설’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단기간이나마 비르효에게 수학했던 경험은 코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에미 프리트와 결혼하면서 시골인 볼슈타인 지방 라크비츠에서 자신의 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의가 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