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F소아청소년과 블로그 홈 GF소아청소년과 블로그 GF내과 블로그 GF영양 블로그 진료안내 찾아오시는길 메비앙

[백신의학자] 파스퇴르 3 :: 2009/03/13 11:29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에서는 그의 업적을 치하하여 1886년부터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오늘날에도 파리 시내에 우뚝 서서 세계의학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가 1888년 11월에 준공식을 가졌다. 파스퇴르는 이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연구소가 한참 건설 중이던 1887년 파스퇴르는 두 번째로 뇌졸중이 발생하여 다시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워졌으며, 대통령의 부축을 받아 참석한 1892년의 70회 생일 축하연에서는 그의 아들이 답사를 대독할 정도로 급격히 쇠퇴해 갔다. 1895년 9월 28일, 73세를 일기로 그 시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그는 파스퇴르 연구소의 지하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었다.

그의 연구와 실험 정신은 사후까지도 남아 파스퇴르 연구소는 창립 이래 100년간 수많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인류가 지금처럼 보다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기여한 것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광견병으로 사망했어야 마땅한 메스테르는 사지에서 벗어난 후 파스퇴르를 공경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파스퇴르 연구소가 문을 열던 해에 중학생이 된 메스테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아니었으나 성적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파스퇴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을 피하여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온 후 일사천리로 전진을 계속하여 파리를 점령하였다. 각종 중요 기관을 점령한 독일군은 파스퇴르 연구소를 찾아가 인수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연구소를 지키던 수위가 지하실 문은 절대로 열어줄 수 없다며 버티는 바람에 인수작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에 총칼이 다가서는 것을 본 수위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였다. 파스퇴르의 묘지가 있는 지하실로 독일군이 들어가는 일을 막으려다 죽음을 택한 그의 이름은 메스테르였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파스퇴르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상은 1901년에 첫 수상자가 배출되었는데, 파스퇴르는 1895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원칙적으로 사망한 사람에게 수여하지 않으며 그 원칙은 지금까지 특별한 예외(다글러스 함마슐트가 사망한 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음)를 제외하고 지켜지고 있다.

파스퇴르가 다른 과학자들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생애를 일관했던 실학주의가 실제로 수많은 업적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학교에 성실했던 그는 대학에서 배우고 가르칠 이론이 실제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실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생산자들의 상담에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 자문을 받은 내용은 프랑스의 토지나 특성, 농업에 관한 것이 주였지만 자문을 받은 주제를 성실히 파헤치면서 위대한 발견을 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하철 12번 노선의 파스퇴르역, 6번 노선과 교차한다)

<세균에 의한 질병의 전염성이 입증되다>

프랑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화학보다도 미생물학의 업적으로 더 유명하다. 처음에는 화학자였으나 여러 가지 세균에 관한 연구와 발견들로 인해 그의 명성이 드높아진 때문이다. 그는 와인이나 맥주의 제조에 매우 중요한 '발효와 음식물의 부패'에 대한 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고안한 우유의 저온 살균법은 그의 이름을 그대로 빌어 파스퇴르법이라 불리우며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또 그는 상처의 감염과 전염병 등이 모두 세균의 작용임을 처음으로 증명하였는데, 그것은 외과 수술에 혁명을 몰고 왔고 프랑스의 양잠업을 구하였으며, 그가 개발한 광견병 백신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 냈다.

특히 세균의 전염에 관한 파스퇴르의 연구 결과는 독일의 과학자 로버트 코치에게로 이어졌고, 1882년에 코치는 결핵의 원인이 되는 세균 발견 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질병의 전염성을 증명하였다. 이때 어떤 한 세균과 특별한 질병과의 연계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도 정확한 가정이 함께 발표되었는데, 이는 지금도 의학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코치와 코치의 발견을 낳게 한 파스퇴르의 업적은 미생물 과학을 선도하였고, 면역학, 공중 위생과 위생학의 진보를 이끌었다. 이것은 지난 1000년 동안 다른 어떤 과학적 진전보다도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히포크라테스에서 파스퇴르까지>

고대인들은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신의 저주를 받았거나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주술사의 힘을 빌어 질병을 퇴치하려 했다.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0년)는 질병의 원인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기질 체액론'을 도입한 이천년이 지나도록 그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으며 17세기에 레베후크가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발견하였음에도 질병과 미생물과의 관계를 밝혀 내지 못하였다.

1820년 당시 영국의 템즈 강이 오수로 흘러 넘쳐지만 런던의 상인들은 강물을 식수로 판매할 정도로 질병의 원인을 밝혀 내지 못하다가 현미경의 발명 이후 200년이 지나서야 1861년 파스퇴르의 연구에 의해 미생물의 자연 발생설은 부정되고 인류에게 질병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찾아지게 된 것이다



<광견병 백신의 개발과 연구의 윤리성>

광견병 백신을 개발하기는 하였으나 안전성에 대한 충분한 검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와 함께 파스퇴르를 찾아 왔던 어린 소년은 당시 9세의 메스테르(Joseph Meister)였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기관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윤리위원회 소집시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며, 그 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한 수십 쪽의 서류를 꾸며야 할 것이다. 이를 행하지 않고 환자에게 처리했다가는 윤리성을 검증하는 도마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논문으로 출판되기도 어려우므로 누군가 자신을 모방하는 연구자에게 업적경쟁에서 뒤질 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결코 120여 년 전의 일만이 아니고, 고아원에서 임상시험을 한 첫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베링(Emil Adolf von Behring, 1854~1927)으로부터 최근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마샬(Barry J. Marshall, 1951~ , 헬리코박터균 발견으로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임상시험을 통해 얻어진 훌륭한 의학적 업적이 많이 있다.

<조국이 우선인 파스퇴르와 코흐>

파스퇴르는 1892년 70세 생일날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아무 쓸모없는 회의론에 빠져 여러분 자신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전 인류에게 닥친 슬픔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낙담하지 않도록 하는 대신에 실험실과 도서관의 고요한 평화 속에서 사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 배움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지 질문하십시오. 그리고 점차 발전하면서 조국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물으십시오.”

파스퇴르의 이러한 연구와 국가관은 당연하게 여러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인 코흐와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학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국이 독일과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1870~71년 프랑스와 프러시아(독일) 간의 전쟁은 비스마르크가 위대한 독일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비스마르크의 기갑부대는 8월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알자스로 진입했고 9월에는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파리를 포위한다. 그러자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말로 아들과 함께 곧바로 지원병을 자청하여 그가 말뿐인 애국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물론 48세의 나이 때문에 아들만 입대하였지만 그 후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도 연구를 계속했다는 일화도 있다.

파리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양국 간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자 파스퇴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프랑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사력을 다할 때까지 저항하기를 원한다. 최후의 날까지 나의 모든 노력은 ‘프러시아에 대한 증오, 복수, 복수!’ 라는 비명에 남을 것이다”

또한 파스퇴르는 1871년 1월, 미생물학에 대한 업적으로 독일 본 대학에서 받은 명예 의학 박사 학위를 돌려주며 “야만과 위선이 프랑스 과학자에게 주입한 분노의 표현으로 당신 대학의 기록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이 학위증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는 양심의 부름에 따른다”고 적었다..

<참고>

1. Naver

2. 브리태니커

3.http://blog.paran.com/blog/detail/postBoard.kth?pmcId=charmsarang&blogDataId=29571781

4.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41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9/03/13 11:29 2009/03/13 11:29
올블로그 블로그 코리아 다음 view 믹시 HanRSS
Trackback Address :: http://blog.gfclinic.co.kr/team/trackback/25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오픈아이디로만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