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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예방 백신 BCG라는 말은 많이 들어 봤어도 칼메트나 게랭과 같은 의학자의 이름은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BCG의 정식 이름은 bacille de Calmette-Guerin vaccine이라고 해서 이 두 의학자들이 발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아이들이 접종하는 백신이죠.


칼메트 Albert (Léon Charles) Calm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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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 7. 12 프랑스 니스 ~ 1933. 10. 29 파리

프랑스의 세균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제자이며 카밀 게린과 공동으로 결핵백신인 BCG를 개발하였으며, 칼메트 반응으로 알려진 결핵진단시험을 기술했다. 또한 칼메트 혈청이라는 뱀독에 대한 항혈청을 개발하였다.

해군 의사가 되고 싶어서 1881년에 Brest에 있는 해군의사학교에 입학하였다. 1883년에 홍콩에 있는 해군의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하여, 말라리아를 공부하고 이 주제로 1886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887년에는 Saint-Pierre and Miquelon에서 일했다. 그후 서아프리카, 가봉과 프랑스 콩고에서 일했으며 거기서 말라리아와 수면병 및 pellagra에 대해 연구하였다.

1890년에 프랑스로 돌아가 세균학에 과정에 있는 그의 교수인 Louis Pasteur와 Emile Roux를 만났다. 1891년에 파스퇴르의 지시로 사이공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파스퇴르 연구소 분소를 설치하였다. 거기에서 면역학의 중요한 관련이 있는 독물학의 초기 분야 연구에 매진하여 뱀과 벌 독, 식물 독 및 큐라레를 연구하였다. 또한 천연두와 광견병에 대한 백신의 생산을 조직화했고 콜레라에 대한 연구, 그리고 아편과 쌀의 발효작용에 대해 연구했다. 1894년 프랑스에 다시 돌아와서 백신접종을 한 말에서 면역 혈청(Calmette 혈청)을 이용하여 뱀에 대한 첫 번째 항독소를 개발하였다. 또한 Alexandre Yersin (1863-1943년)과 함께 Yersinia pestis 병원성 물질의 발견에 협조하여, 흑사병에 대한 첫 면역혈청을 개발하는데 참여했다. 그리고 Oporto에서 발생한 전염병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하여 포르투갈에 갔다.

1895년에 Roux는 Lille분소(Institut Pasteur de Lille)의 소장으로 위임하였고, Calmet는 거기서 25년간 머물렀다. 1901년에, 그는 Lille에서 첫번째 antituberculosis 의무실을 설립하였고, Emile Roux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1904년에, 오늘까지 존재하는 ‘Ligue du Nord contre la Tuberculose, (Antituberculosis 북부 리그)를 설립하였다. 1909년에, 그는 알제리 연구소 분원울 설치하는 것을 도왔다. 1918년에는 파리에 있는 연구소의 부소장을 맡았다.

그의 주요 업적은 그 당시 거대 살상 질환인 결핵에 대한 백신 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으로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의학역사에 영원히 남겼다. 독일 생물학자 코흐가 1882년에 결핵은 Mycobacterium tuberculosis가 병원균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Louis Pasteur 역시 관심을 가졌었다.

1906년에 수의사이자 면역학자인 Camille Guérin은 결핵에 대한 면역은 혈액내에 살아있는 결핵간균과 연관이 있다고 발표하였다. Pasteur의 연구법으로 Calmette는 면제가 동물에 주사된 약독화된 우형 간균에 대한 반응으로 어떻게 면역이 생기는지를 조사했다. 2명의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Bacillum Calmette-Guérin, 또는 BCG)로 이름지어졌다. 약독화는 노르웨이 연구원인 Kristian Feyer Andvord(1855-1934)의 아이디어에 근거하여 담즙이 포함된 배지에서 배양하여 만들어졌다

1908년에서 1921년까지 Guérin과 Calmette는 연속적 배지로 옮기면서 간균의 악성 균주를 약화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마침내 1921년에 파리 Charité에서 신생아에게 성공적으로 BCG를 접종하였다. 그러나 백신 프로그램은 1930년 독일 Lübeck에서 우두를 접종시 오염으로 72명의 백신을 접종한 아이에서 결핵이 생기면서 심각한 방해를 받았다..

아이들의 대규모 접종은 새롭고 더 안전한 생산 기술이 갖추어졌을 때인 1932년 후에 많은 국가에서 재시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almette는 파리에서 1년 뒤에 죽은 사건에 의해 깊이 동요되었다. 이 백신은 유럽 대륙에서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칼메트가 죽은 후에도 미국과 영국에서는 채택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40년에 비로소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956년 영국 의학연구위원회의 후원으로 BCG가 결핵에 대한 실질적인 방어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1914년 Henriette Caillaux에 의해 살해된 Le Figaro지의 편집장인 Gaston Calmette (1858-1914년)의 형제였다.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1k1763a>


게랭 Camille Gué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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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 12. 22 프랑스 푸아티에 ~ 1961. 6. 9 파리.

프랑스의 세균학자 게랭(Guérin, Camille, 1872~1961) 출생

알베르 칼메트와 함께 결핵예방 백신(Bacillus Calmette Guerin/ BCG)을 개발한 학자.

수의사로 경력을 쌓은 뒤 게랭은 1897년 릴리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칼메트와 함께 일하게 되었으며, 일생을 백신연구에 바쳤다. 그는 1906년 결핵에 대한 저항력이 몸속에 있는 간균(桿菌)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혔으며, 13년에 걸쳐 칼메트와 함께 독성이 더 작은 우(牛)결핵균을 배양해내는 데 성공했다. 1921년에는 마침내 그들이 배양한 세균이 인체에는 해를 주지 않으면서 항체형성을 촉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22년 파리의 샤리테 병원에서 출생한 신생아들에게 최초로 그들이 만든 백신을 접종했다.

백신에 대한 모든 의문점들이 해결된 1930년대부터는 일본·러시아·중국·영국·캐나다·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도 집단을 대상으로 백신접종이 실시되었으며, 1950년부터는 일리노이대학과 그 연구재단이 미국에서 생산과 판매를 시작했다. 게랭은 죽을 때까지 파스퇴르 연구소의 명예소장으로 있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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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코흐는 탄저균 발견으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궁핍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세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미생물과 세균을 염색하여 현미경 사진을 찍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것 역시 세균학에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 세균학을 다시 한 차원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진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 살인적인 벌레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현미경을 볼 수가 없고 또 하나의 세균을 보고도 두 사람이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러나 사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열 사람이 그것을 연구해도 동일한 의견에 이를 수 있다.’

1877년 코흐는 세균에 대한 연구·보존법·사진술 등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현미경사진으로 발표된 연구논문에서 그는 유리 슬라이드 위에 세균의 얇은 막을 만드는 방법과 이것을 약한 불로 고정시키는 방법을 서술했다. 그는 또한 유리 슬라이드에 있는 배양액 한 방울에서 미생물을 키울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방법인 현적배양(顯滴培養 hanging-drop technique) 방법과 기구들을 고안했다. 1878년에는 상처감염의 원인에 대한 실험을 요약하여 발표했는데, 다양한 재료에서 얻은 물질을 동물에게 접종하여 각각 다른 특정한 미생물에 의해 6가지 종류의 감염증을 만든 후, 이 감염을 접종을 통해 여러 종류의 동물에게 주입시켜서 원래의 6가지 감염증을 다시 만들었다. 이 연구에서 그는 숙주가 다른 종(種)이면 병원성도 달라진다는 것을 관찰했으며 동물의 몸은 훌륭한 세균 배양기가 된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창상감염증(創傷感染症)·재귀열(再歸熱)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1880년 독일 정부는 코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베를린국립보건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한다. 초등학교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 선수로 등록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교될 만큼 그의 임명은 파격적이었다. 코흐는 37세에 비로소 자신이 완성한 일에 합당한 연구 시설, 두 명의 조수 및 풍족한 연구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흐가 연구소를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로 자리 잡도록 유도하자마자 단기간에 실적이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학자들이 발견하려고 애태우던 결핵균 병원체의 발견에 도전했다.

당시 결핵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 원인이 어떤 종류의 미생물임에 틀림없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결핵은 병든 사람에게서 건강한 동물에게로 전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레슬라우의 콘하임 교수는 폐병환자의 병든 폐 조직을 토끼 안구의 전실에 넣으면 결핵에 걸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코흐는 콘하임 교수의 실험을 자세히 연구했다.

그가 다른 학자들보다 빨리 결핵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료 조직을 강력한 염색액으로 염색하는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드디어 코흐는 죽은 파란색으로 염색된 폐 세포 사이로 작고 아주 가는 간균들이 모인 이상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일직선으로 된 탄저균과 같은 모양이 아니라 조금씩 구부러져 있었다. 더구나 그것들은 너무나 가늘어서 1만 5000분의 1인치도 안 되었다. 코흐는 전형적인 독일인답게 매우 신중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조수들이 결핵균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코흐는 곧바로 자신의 발견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론에 착수했다.

우선 코흐는 죽어 가는 실험동물들의 몸에서 간균을 분리한 후 그것들을 쇠고기 추출액으로 만든 고형배지 위에서 기른 뒤 그 균의 순수 집락을 얻었다. 그것을 다른 균과 격리시켜 수개월 동안 배양한 뒤 건강한 동물들에게 접종하자 동물들이 결핵에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실험용 동물들이 결핵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코흐는 자신의 실험이 실패한 원인으로 결핵균이 살아 있는 동물의 몸속에서만 자란다고 추측했다. 소위 결핵균은 완벽한 기생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유명한 배지인 혈장 젤리를 발명하여 보통 배지에서는 자리지 않는 까다로운 미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의 예측은 놀랍게도 정확하게 들어맞아 결핵에 걸린 원숭이와 황소, 기니피그에서 얻은 치명적인 간균을 43종이나 혈장 젤리 시험관에서 배양했다. 그 균을 건강한 동물에 주사했고 건강한 동물들은 결핵에 걸렸다.

코흐는 드디어 결핵균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코흐는 사람들이 먼지 속에 있는 균을 흡입하거나 혹은 결핵 환자들의 기침 때문에 결핵균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건강한 동물도 그런 경로로 병에 걸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실험은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코흐 자신이 결핵에 걸릴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결핵 환자의 기침으로도 결핵균이 옮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코흐는 결핵에 걸리지 않았다. 1882년 3월 24일 코흐는 베를린의 생리학회에서 그가 모든 종류의 결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결핵간균을 분리해서 배양했다고 발표했다. ‘세계 결핵의 날’은 1882년 3월 24일 결핵균을 발견한 코흐를 기려 만든 날이다.

한편 코흐는 이집트에 콜레라가 출현하여 유럽에 전파될 위험이 생기자 독일 정부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이 병의 연구를 위해 자신의 연구를 잠시 중단하고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 그는 쉼표 모양의 간균이 콜레라의 원인일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콜레라의 유행이 이미 그친 상태였기 때문에 더이상 연구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메바성 이질의 원인과 이집트결막염의 2가지 변종의 원인이 되는 간균을 발견했다. 그는 콜레라가 풍토병인 인도로 가서 그의 임무를 완수했는데, 콜레라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을 발견했고 그것이 식수·음식·의복 등으로 전파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것이 1885년이다.

같은 해 베를린대학(Imperial Health Office) 위생학 교수로 임명되어 결핵의 치료약 연구에 몰두하여 1890년에는 결핵균에 대한 항원인 투베르쿨린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당초에 그가 기대했던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으나, 결핵치료약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당시 세계 의학계를 몹시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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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에 대한 연구를 재개했을 때 코흐는 죽은 간균을 살아 있는 결핵균을 투여받았던 사람에게 주입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연구했으며, 주입 결과 나타나는 국소적 반응으로 결핵을 진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 단계에서는 치료도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 연구에서 결핵균 배양에서 만들어진 무균의 액체를 사용했는데, 이 액체(투베르쿨린, 1890)는 원래 결핵 치료약을 목표로 했으나 치료 효과는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고 심지어 투약한 환자의 경우에는 결핵이 아니라 부작용으로 죽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나 과거에 앓았던 결핵을 조사하는 수단으로서의 중요성은 지금으로서는 큰 업적이지만 그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코흐는 말년에 결핵에 관한 몇 가지 연구를 더 했으나 투베르쿨린이 실패한 이후에는 주로 나병·우역(牛疫)·선(腺)페스트·텍사스열병·말라리아 등 동물과 인간의 광범위한 질병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말라리아의 전염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코흐는 그것이 모기를 통해서 전염된다고 결론지었는데, 영국의 세균학자 로널드 로스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발견들을 발표하자 자신의 결론에 대하여 만족했다. 1901년 인간의 결핵균이 가축에 병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사람이 소의 결핵균에 의해 감염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조처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결론은 유럽과 미국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거부되었는데, 부분적으로 틀렸다고 증명되기는 했으나 코흐의 이론은 이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켰다. 성공적인 예방조처들은 대부분 코흐에 의해 만들어진 방법들이다.

1904년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가서 아프리카 재귀열의 병원체와 전염경로를 밝혀 냈다. 체체파리(tsetse flies/Glossiniidae)에 의해 매개되는 병의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여, 1906~1907년에 수면병(睡眠病)에 관한 뛰어난 연구를 발표하고 동시에 이의 치료법도 밝혔다. 1908년에는 세계 여행으로 동양에 체류하기도 했다.

1905년 결핵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상 수락연설 마지막 부분이다.

‘The struggle has caught hold along the whole line and enthusiasm for the lofty aim runs so high that a slackening is no longer to be feared. If the work goes on in this powerful way, then the victory must be won.’

‘(결핵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은 그 기반이 확고하게 마련됐으며 그러한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열정은 강하기 때문에 (치료법이) 조금 늦는다고 해도 더 이상 무서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처럼 강력하게 추진만 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1910년 5월 27일 바덴바덴에서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주요저서에는 《Aetiologie der Wundinfektionskrankheiten》(1878), 《Bubonenpest》(1898), 《Bekampfung des Typhus》(19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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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참고 문헌

1. 《유한준 과학이야기, 과학을 빛낸 사람들 3》/유한준 글, 신혜원 그림/도서출판 산하

2. L. G. Stevenson 글 | 金玉珠 옮김

3. 과학자의 명언과 영어공부| (94) :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코흐

김형근 편집위원 hgkim54@hanmail.net

4. Science Times - 로베르트 코흐 -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39

5. Naver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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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에 야전외과의로 잠시 복무하다가 당시 독일 땅이었던 볼슈타인 지역의 외과의가 되어 이곳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는 현미경, 조직을 얇게 자르는 기구인 마이크로톰, 집에서 만든 세균배양기 등을 갖추고 조류(藻類)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후에 병원미생물에 대해 연구했다. 그의 아내가 환자가 없어 적적해하는 남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현미경을 선물한 것이 그의 인생을 세균학자로 이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일 연구에 매달리고 있던 코흐에게 재혼한 젊은 아내 프라이베르크가 큰 돈을 들여 현미경을 선사한 것이다. 코흐가 현미경을 선물 받았을 무렵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 탄저병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 병에 걸린 양이나 소는 일단 감염되면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사람들도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괴팅겐대학교에서 코흐의 스승이자 해부학자·조직학자였던 F. G. J. 헨레가 1840년에 감염성질환은 살아 있는 미세 유기체에 의해 일어난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1850년에 프랑스의 기생충학자인 C. J. 다벤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혈액에서 유기체를 처음으로 관찰했으며,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의 혈액을 건강한 양에게 접종하면 탄저병이 전염된다는 사실과 죽은 양의 혈액에서 막대기 모양의 미세한 소체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보고했다. 1863년 다벤은 프랑스의 미생물학자인 L. 파스퇴르의 연구에 영감을 받아서 이러한 막대기 모양의 소체가 없으면 양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탄저병은 혈액 내에 이 유기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저병의 자연사(natural history)는 완전히 밝혀지지 못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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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흐는 이런 보고들에 주목하고 탄저병에 대한 관심이 생겨 연구를 시작했다.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실험용 쥐에 주사하자 쥐는 하루 만에 죽었으며 죽은 쥐의 혈액에서도 간상체를 다수 발견하였다. 간상체는 길게 실 모양으로 늘어서기도 했고 작고 둥근 모양으로 분리하여 포자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 세균은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일단 포자가 형성되면 주변 환경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져 어떤 상황에서든 견뎌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코흐는 자신이 만든 수수 배지에서 간상체, 즉 탄저균을 배양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렇게 배양한 균을 다른 동물에 주입하여 자신이 뜻한 대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

코흐는 탄저병이 탄저균이라는 특정한 병원균이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대단히 신중하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비슷한 실험을 몇 백 번이 넘도록 되풀이하여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건강한 다른 동물에 주입하면 다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두 번째 동물에서 채취한 혈액을 세 번째 동물에 주입하면 오히려 탄저병이 더 빨리 발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이런 과정을 거듭할수록 탄저균의 독성은 더욱 강해져 나중에는 탄저균이 혈액에 있는 다른 세균들을 거의 다 죽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계속하여 탄저균을 분리하고 배지에서 순수 배양을 하여 탄저균의 중앙부가 끊어지면서 분열⋅증식하는 양상도 파악했다. 또한 탄저균은 약하고 잘 죽지만, 그 포자는 저항력이 강해 공기 중이나 흙 안에서 오래 생존하며, 동물체 내에 들어가면 다시 세균이 되어 증식하면서 탄저병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즉 포자는 동물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생기지 않고 동물이 죽은 다음에만 나타나고 또한 동물이 따뜻하게 보존될 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포자는 병을 옮길 수 있는 대상을 찾았을 때만 작동을 한다는 뜻이다. 즉 잠복해 있던 포자가 조건이 좋아지면 막대기 모양의 간균으로 자라서 탄저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1876년 5년에 걸친 자신의 연구에 확신을 가진 코흐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코흐는 세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코흐의 정리’, 또는 ‘코흐의 공리’ (Koch’s postulations)를 제시했다. “한 질병에는 오직 한 병원체만이 존재한다”. 코흐의 이론을 후세학자들은 ‘특정병인론’ 이라 불렀다

“To establish that an organism is the cause of a disease, it must be:

- found in all cases of the disease examined

- prepared and maintained in a pure culture

- capable of producing the original infection, even after several generations in culture

- be retrievable from an inoculated animal and cultured again.”

한 생물체가 한 질병의 원인이라는 논리를 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설립돼야만 한다.

-같은 질병에서는 꼭 같은 생물체가 발견돼야만 한다.

-병원체는 순수배양 속에서 얻고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배양 속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 처음과 꼭 같은 질병(감염)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실험용 동물로부터 병원체를 다시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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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특정한 병원체이다는 것으로, 콜레라를 일으키는 병원체는 콜레라균이고 결핵을 일으키는 것은 결핵균이다라는 주장이다. 그 시기에는 세균과 질병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병원체가 신체 각 부위마다 여러 질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흐(Robert Koch)는 특정한 질병(specific disease)에는 분명히 특정한 원인(specific cause)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즉 특정한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특정한 병원체라는 것이다.

이 당시 코흐가 자신의 연구를 발표한 상황은 전설적이다.

코흐는 원래 학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홀스타인 지방에서 가난한 의사로 생활하면서 연구를 했기 때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코흐는 1876년 브레슬라우 대학(현재는 폴란드의 브로츨라프)에 있는 학창 시절의 은사로 세균 분류의 권위자인 콘(Hermann Cohn, 1828〜1898) 교수를 찾아갔다. 코흐의 설명을 들은 콘은 코흐의 연구에 흥미를 가질지도 모르는 여러 명의 교수를 불렀다. 그 중에는 유명한 병리학자 율리우스 콘하임(Julius Cohnheim, 1839〜1884) 교수도 있었다. 코흐가 3일간에 걸쳐 여러 해 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얻은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하자 콘하임 교수는 젊은 연구생들이 있는 연구실로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미진한 점이 없이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나는 이것이 세균에 관한 것 중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하며, 이번이 젊은 로베르트 코흐가 뛰어난 연구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또 부끄럽게 하는 마지막이 아니리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 때 코흐의 방으로 간 젊은 연구생 중에 한 명이 나중에 코흐의 제자가 되어 ‘마법의 탄환’이라고 불린 살바르산(606호)를 발견한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이다.

코흐가 이 당시 교수들을 놀라게 한 또 다른 요인은 탄저병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 제시했기 때문이다.

‘탄저병으로 죽은 모든 동물은 죽자마자 없애버려야 합니다. 만약 태워버릴 수 없다면 땅 속 깊은 곳에 묻어야 합니다. 흙이 차가워져 막대균이 강하고 오래 견디는 포자로 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876년에 먼저 포자의 발견을 발표한 콘도 크게 감명을 받아 코흐의 획기적인 논문의 출간을 도와주었다. 코흐에 의한 탄저병의 병원체인 탄저균 발견 뉴스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콘의 제자인 요제프 슈뢰터는 색소생성세균이 감자, 응고된 달걀 흰자위, 고기, 빵 등의 고체 물질에서 자라며 이러한 세균의 콜로니(colony)가 같은 종류의 유기체로 이루어진 같은 색깔의 새로운 콜로니를 형성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코흐가 몇 년 뒤 고안해낸 순수배양기법(pure-culture technique)의 출발점이었다. 병을 유발하는 유기체가 몸 밖에서 배양될 수 있다는 개념은 파스퇴르에 의해 도입된 것이지만, 완벽한 순수배양기법을 고안하여 유기체의 완전한 생활사를 밝혀주는 정확하고 정교한 실험을 한 것은 코흐였다. 탄저병 연구는 처음으로 특정한 질병과 특정한 세균과의 분명한 인과관계에 대해 확신할 만한 증거를 제공했다. 그 무렵 세균학 연구의 제1인자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였다. 탄저균의 발견으로 코흐에게 선수를 놓친 파스퇴르는 1881년이 되어서야 탄저병 예방 접종 백신요법으로 코흐의 명성을 추월할 수 있었다.

코흐의 대 발견도 혈액응고에 대해 결정적인 연구를 한 루돌프 비르효(Rudolph Virchow) 교수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다고 황상익은 적었다. 비르효는 세균병인설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코흐가 논문을 갖고 찾아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891년 결국 비르효도 세균병인설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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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헤르만 로베르트 코흐

(Heinrich Hermann Robert Koch)

(1843년 12월 11일 ~ 1910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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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의사, 미생물학자이다. 탄저균(1877년), 결핵균(1882년), 콜레라균(1883년) 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핵균의 발견으로 190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다섯 번째 노벨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일반인들에게는 ‘결핵균의 발견자’로, 의사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세균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전세계 의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학자중 한 명이었다.

우표 모델로 최다 출연한 과학자를 꼽으라면 정답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벨상을 수상한 ‘세균학의 창시자’ ‘로베르트 코흐’라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결핵균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에이즈를 발견한 과학자의 우표도 발행된 적이 없는데 결핵균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우표의 모델로 사용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류에게 공헌한 바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다면 그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코흐가 과학자로서 파격적으로 명예로운 대우를 받는 것은 그의 연구가 다른 어떠한 과학자보다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서양 및 동양으로부터 온 그의 제자들은 세균학의 새시대를 여는 창조자들이 되었다. 코흐의 트리파노소마(trypanosoma)에 관한 연구는 저명한 독일의 세균학자인 P. 에를리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코흐의 획기적인 연구가 끼친 영향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발견과 기술혁신은 그의 병인론의 기본 개념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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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흐는 1843년 12월 11일 독일 하노버 클라우스탈에서 광산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신문으로 혼자 공부하여 글자를 읽고 써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신동이었는데 초·중등학교 당시에 생물학에 취미를 보였고 차분하고 끈기 있는 소년으로 알려졌다.

1862년 괴팅겐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프리드리히 구스타프 야코프 헨레 밑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1866년 의학박사를 취득하였고 졸업 후에 세포 병리학의 창시자이자 ‘의학의 교황’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던 루돌프 비르효(Rudolf Virchow, 1821~1902) 밑에서 6개월간 수학했다.

비르효는 공중보건위생의 개선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의 근본적인 개혁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이다. 특히 그는 ‘의학이란 거시적으로 보아 사회과학이며 정치학이다’라고 말하는 등 의학 분야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비르효는 의학과 의술이 그 자체나 의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정신과 또 그러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학이 갖는 정치적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의학의 정치성을 강조한 것은 국민 건강을 증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보건 의료에서의 변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848년 가난한 북부 실레지아에서 발생한 발진티푸스가 창궐한 뒤 프러시아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비르효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황상익 박사의 글에서 인용한다.

‘이것은 더 이상 발진티푸스에 걸린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의학적 치료와 간호를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육체적으로 최대로 쇠약해진 150만 시민의 안녕에 관한 문제이다. 150만 명의 주민을 생각할 때 언제까지나 미봉책으로 대할 수는 없으며 근본적인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한다면, 주민들이 힘을 합치도록 격려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교육·자유·복지는 지금까지와 같이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한 성과를 얻을 수 없으며, 주민들이 스스로 그 필요성을 자각할 때에만 진정 그것을 이룰 수 있다.’

의학의 정치성을 강조했던 비르효의 의학적 업적은 정맥의 염증을 연구하여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혈전(血栓)과 색전(塞栓)의 형성 기전을 규명한 것과 출혈성 백혈병이라는 병의 존재와 특성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특히 비르효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세포는 건강한 사람이나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생체 기능의 시작이자 발판이며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생긴다’는 ‘세포학설’을 확립했고 또한 세포가 바로 질병이 생기는 자리라는 ‘세포병리학설’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단기간이나마 비르효에게 수학했던 경험은 코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에미 프리트와 결혼하면서 시골인 볼슈타인 지방 라크비츠에서 자신의 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의가 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이었다.